빚의 숫자
강태준은 숫자를 믿지 않았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말했지만, 그 말은 숫자를 읽는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위로에 가까웠다. 통장 잔액은 지난달보다 줄어 있었고, 병원비는 지난주보다 늘어 있었다. 화면에 뜬 숫자는 정확했지만, 그 정확함이 그의 삶을 조금도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2018년 늦가을의 서울은 해가 일찍 졌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창문 밖 사무실 유리에는 이미 검은 건물들이 겹쳐 있었다. 태준은 여섯 달 동안 다니던 증권사 건물 지하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혼자 밥을 먹었다. 계약이 끝났다는 말은 점심시간에 들었고, 퇴직 서류는 저녁 전에 메일로 도착했다.
그는 밥을 절반쯤 남겼다. 예전 같으면 남은 반찬을 포장해 갔겠지만, 그날은 그럴 힘도 없었다. 휴대전화에는 어머니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 세 통과 카드사 번호 네 개가 찍혀 있었다. 태준은 화면을 뒤집어 놓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숫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는 계산기를 열었다. 어머니의 다음 검사비, 두 달 밀린 월세, 아버지가 창고를 정리하다 빌린 돈, 자신이 보증을 섰던 소액 대출. 항목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자 화면 아래에 합계가 떴다. 3,184만 원. 태준은 그 숫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의 4를 지웠다. 3,180만 원이면 조금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집 현관 앞에는 독촉장이 반으로 접힌 채 끼워져 있었다. 발신인 이름은 낯설었지만 문장은 익숙했다. 정해진 날짜까지 상환하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말. 태준은 종이를 읽고도 바로 버리지 못했다. 누군가의 문장은 버릴 수 있어도 그 문장이 가리키는 시간은 버릴 수 없었다.
어머니는 거실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고 했다. 검사 날짜를 미루면 안 되느냐고 물었지만, 어머니는 대답 대신 냉장고 위에 놓인 봉투를 가리켰다. 아버지가 남긴 영수증과 창고 열쇠가 들어 있었다. 오래된 열쇠 하나가 봉투 안에서 부딪힐 때마다 작은 금속음이 났다.
“아버지는 아직 창고에 계셔?” 태준이 물었다.
“저녁 먹고 온다고 했어. 네가 계약 끝난 건 알고 계시니?”
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에게는 괜찮다고 말했고, 회사에는 다음 일자리를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 말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당장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문장은 그것뿐이었다.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가족은 서로의 거짓말을 알아도 모른 척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밤 열 시가 지나서 민재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대학 시절부터 쓰던 메신저의 알림음이었다. 태준은 한 번 지우려다 손을 멈췄다. 재혁의 이름 아래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떠 있었다.
— 아직 숫자 보고 있냐?
태준은 답을 쓰지 않았다. 재혁은 기다렸다는 듯 두 번째 메시지를 보냈다.
— 내일 아침에 움직일 종목 하나 있어. 큰돈 말고,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태준은 피식 웃었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이라는 말은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이었다. 잃어도 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잃을 수 없는 사람을 골라내는 말. 증권사에서 일할 때 고객들의 표정으로 그 뜻을 배웠다.
그는 메신저 창을 닫았다. 그러자 모르는 번호로 알림이 하나 더 도착했다. 초대된 적 없는 비공개 대화방이었다. 방 이름은 ‘새벽의 장부’였다. 참여자는 열두 명. 프로필 사진은 모두 기본 이미지였고, 대화 기록은 최근 일주일치만 남아 있었다.
상단 고정 메시지에는 종목 이름 대신 시간이 적혀 있었다. 오전 아홉 시 삼십 분, 오후 두 시, 장 마감 십 분 전. 그 아래에는 누군가가 올린 짧은 문장이 있었다.
— 숫자는 움직이기 전에 먼저 사람을 움직입니다.
태준은 화면을 확대했다. 문장 아래에 작은 칩 모양의 이미지가 붙어 있었다. 검은 바탕에 은색 선이 하나 새겨진 단순한 그림이었다. 장난 같은 상징이었다. 그러나 태준은 그 그림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의 창고 서랍 안에서, 오래된 영수증 사이에 끼워져 있던 것과 비슷했다.
그때 재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태준은 한참 망설이다가 받았다.
“방 들어갔지?” 재혁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가벼웠다. “아직 늦지 않았어.”
“무슨 방이야?”
“정보 공유하는 곳. 네가 잘하던 거 있잖아. 숫자 읽는 거.”
“나 이제 그런 거 안 해.”
“회사 그만뒀다며. 그래서 말하는 거야. 월급이 끊긴 사람한테 원칙만큼 비싼 것도 없거든.”
태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버스가 지나갔다. 젖은 도로 위에서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그 빛은 빨간색과 흰색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젖은 아스팔트에서는 모두 비슷한 회색으로 번졌다.
재혁은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 건 다르다. 누가 올리는 추천을 믿으라는 게 아니야. 네가 확인하고 네가 결정하면 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마지막에 남의 결정을 탓하더라.”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야. 감정 없이 숫자 보는 사람.”
태준은 전화를 끊었다. 감정 없이 숫자를 본다는 말이 칭찬인지 비난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에게 숫자는 감정을 없애 준 적이 없었다. 숫자는 오히려 감정을 가장 정확한 모양으로 보여 줬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태준은 계좌를 다시 확인했다. 잔액은 47만 2,360원이었다. 그 아래에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입금 예정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처리 예정 금액 300만 원. 발신인 표시는 비어 있었다.
태준은 고객센터에 문의하려다가 멈췄다. 잘못 들어온 돈이라면 돌려줘야 했다. 그러나 그 돈이 정말 잘못 들어온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입금 예정일은 다음 날 오전 아홉 시였다. 그때까지 태준에게는 선택할 시간이 열 시간도 남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창고 열쇠를 손에 쥐었다. 열쇠에는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오래된 기름때라고 했지만, 태준은 얼룩 모양이 메신저 방에 붙은 칩의 선과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새벽의 장부에서 온 알림이었다. 누군가가 숫자 하나를 올렸다. 09:30.
곧이어 재혁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 내일 아홉 시 반. 네가 첫 번째로 선택할 시간이다.
태준은 화면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자 통장 잔액과 병원비, 창고 열쇠와 검은 칩이 차례로 떠올랐다. 모두 서로 다른 물건인데 이상하게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이 오면 300만 원이 들어올 것이다. 그 돈이 누구의 것인지, 왜 자신에게 오는지, 돌려보낼 수 있는지 태준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돈을 받는 순간부터 자신은 더 이상 구경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새벽 두 시가 지나도록 그는 잠들지 못했다. 창밖의 마지막 택시가 골목을 빠져나간 뒤, 메신저 화면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 판에 들어온 사람은 판 밖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태준은 그 문장을 읽고도 대화방을 나가지 않았다. 대신 입금 예정 알림을 캡처해 별도의 폴더에 저장했다. 파일 이름은 날짜도, 금액도 아니었다.
‘처음.’
그가 그렇게 적은 순간, 화면 아래의 숫자 하나가 바뀌었다. 처리 예정 금액 300만 원이 입금 완료로 바뀌었다. 태준은 숨을 멈췄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